박노해
가을이 깊어지면 어머니는
찰벼, 들깨, 녹두, 기장, 콩, 고추, 조, 수수
한 해의 결실을 흙마당 멍석에 늘어놓고
세 갈래로 정갈히 분류하셨다
가장 좋은 것은 내년에 씨 뿌릴 종자로
그 다음 좋은 것은 이웃들 품삯과 선물로
나머지는 우리 먹을 식량으로 갈무리하셨다
어린 나는 그것이 불만이었다
가장 굵고 여물고 실한 것들은 왜
땀 흘려 거둔 우리가 먹어보지도 못하고
종자로 싸매 달고 이웃에게 나눠주는지
그날 밤 호롱불 앞에 기도를 마친 어머님은
평아, 농사는 누가 짓는 것이냐
하늘이 짓고 기후가 짓고 대지가 지어 주신단다
이 결실들이 어디서 나온 것이냐
땅에 묻힌 종자에서 나오는 거란다
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계획을 세우고 재주를 부려도
하늘이 한 번 흔들어 버리면 다 소용없는 일이란다
아무리 큰 재난이 닥쳐도 서로 믿고 기댈 수 있는
사람 관계만 살아 있다면 두려울 게 없단다
그러니 우선순위를 바로 해야 한단다
어려운 날이 닥치고 앞이 안 보일 때마다
너의 우선순위를 바로 하라!
그 가을 어머니 말씀이 새롭게 울려오네
- 박노해 시집 『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』-
